[전업농신문=편집부] 국내 농민단체들의 강력한 반발 속에 정부가 지난달 25일 사실상 세계무역기구(WTO) 개도국 지위를 내려 놓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날 제208차 대외경제장관회의를 개최해 미래에 WTO 협상이 전개되는 경우 우리 농업의 민감분야는 최대한 보호할 수 있도록 유연성(flexibility)을 협상할 권리를 보유·행사한다는 전제하에 ‘미래 WTO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특히 개도국 지위 포기(forego)가 아닌 미래 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not seek)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장 농업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없으며, 미래 협상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대비할 시간과 여력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이날 발표는 미국 측이 경제적 발전도가 높은 국가가 WTO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누리고 있다며, 10월 23일까지 우리 정부의 결정을 요구해온데 따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정부 발표대로 당장은 농업분야에 큰 피해가 없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농산물 관세율이 크게 낮아지고 농업보조금의 축소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국내 농업에 큰 타격이 우려된다. 구체적으로 국내 연구기관이 지난 5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농민중 절반 이상 짓고 있는 쌀의 경우 관세가 현행 514%에서 393∼154%로 대폭 낮아지고, 농업 보조금도 현행 1조4900억원에서 8195억원으로 절반 정도 축소해야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정부가 WTO 개도국 지위를 내려 놓겠다고 하면서 내놓은 대책은 새로운 내용이 없어 농민단체들의 큰 반발을 사고 있다. 농업인 소득 및 경영 안정을 적극 지원하겠다면서 내세운 공익형 직불제의 도입은 이미 정부가 내년 예산안에 2조2천억원으로 편성, 국회에 제출돼 있는 상태다. 그나마 정치권이나 농업계에서 요구하는 2조3천억∼3조원보다 턱없이 부족하다. 벌써 결정해야 할 2018년~2022년까지의 쌀 목표가격도 감감 무소식이다.

국내 농산물의 수요기반을 넓히고 수급조절기능을 강화하겠다는 대책도 마찬가지다. 로컬푸드 소비기반 마련을 위한 지원이나, 주요 채소류에 대한 가격안정제 확대, 품목별 의무자조금을 활용한 자율적 수급조절 등은 현재 추진중인 대책에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청년‧후계농 육성을 위한 청년영농정착지원금 제도나, 농지은행 등 청년농에 대한 농지·자금지원 등도 역시 매년 추진 중인 정책이다.

그러면서 정부가 내년 농업예산을 최근 10년내 가장 높은 증가율 수준(+4.4%)으로 확대한 15조3천억원을 편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국가 전체 예산 513조5000억원의 2.98%에 불과한 것이며, 전체 예산 증가율 9.3%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농업계에서 그동안 계속해서 요구해 왔던 국가 전체예산 대비 5%에도 턱없이 부족한 것이며, 현정부가 농업을 홀대하고 있다고 가장 크게 비판 받는 부문이기도 하다.

결국 정부의 이번 WTO 개도국 지위 포기 방침은 농업계와의 충분한 사전 조율이나 협의 없이 미국의 통상압력에 굴복해 졸속으로 결정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농업인들은 농산물 가격폭락과 연이은 가을 태풍피해에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그동안의 농업 대책을 열거하면서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농민단체들이 이번 정부의 WTO 개도국 지위 포기방침을 통상주권과 식량주권을 포기하는 선언이라며, 강력한 투쟁을 예고하고 있는 이유다.

 

저작권자 © 전업농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