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석 농정연구센터 이사/지역아카데미 대표

지난 50여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공동농업정책 개혁 속에서도 EU의 공동농업정책은 유럽경제공동체의 설립정신과 가치를 계승하고 있다.

EU의 헌법과도 같은 1957년의 로마조약에서 공동농업정책은 ‘소비자들에겐 적정가격으로 식료품을 공급하고, 농업인들에겐 균형있는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고 탄생했다.

이를 위해 공동농업정책은 EU의 우선적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가격지지 정책에 이어 소득보전 직불, 공익적 기능에 대한 보상 등을 통해 농업경영을 뒷받침해왔다. 그 결과 자급자족을 넘어서 안전하고 품질 좋은 농산물을 유럽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물론, 생물다양성과 아름다운 경관 등 다양한 형태의 공공재를 생산함으로써 유럽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해왔다.

공동농업정책을 배경으로 각 회원국들은 자국의 농업부문을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진행 속도에 맞추어 다른 분야와 균형있게 발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수단들과 제도들을 도입했다.

농업, 농촌부문에 대한 균형발전 과제를 가장 체계적으로 그리고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도입해 장기간에 걸쳐 일관성 있게 이끌고 간 나라는 프랑스일 것이다. 프랑스는 EU 공동농업정책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진화시켜 나갔을 뿐만 아니라 공동농업정책과의 연계 속에서 국내 정책환경을 사전적으로 조성해갔다.

프랑스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인 샤를 드골의 집권시기(1959~1969)에 농업기본법이 제정되고, 공동농업정책이 시행에 들어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산으로서가 아니라 선택가능한 직업의 하나로서 농직업을 새롭게 설계하려는 청년농민단체 지도자들과 존경받는 우파정치인들이 힘을 합쳐 농업기본법을 설계하고, 농정을 공동운영했다.

부부노동력 중심의 가족농 육성, 이용자 중심의 농지제도, 협동조합 중심의 생산자 조직화, 농업경영의 법인화, 농업인에 대한 균형있는 사회보장 및 세제시스템 운영 등 많은 분야에서 정책과 제도혁신이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농가 수가 감소하고 청년층의 농업진입이 더딘 것은 여전했다.

그렇지만 현재 남아있는 농가들과 농업에 새로 진출하고 있는 청년농업인들의 농업에 대한 직업적 만족도와 농촌에서의 삶의 질에 대한 만족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 이상이다. 가족농들은 자녀세대들과 함께 보다 다각화된 농업활동을 수행하면서 부쩍 유동인구가 많아진 농촌에서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

직불제는 유럽 농가들의 직업적 만족도와 삶의 질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사회구성원들의 직업간 균등발전과 지역간 균형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가격지지를 대신해 도입된 직불제는 농지제도, 농업활동에 대한 세제, 농업활동에 참여하는 농업인들에 대한 사회보장시스템 등 농직업을 규정하는 다른 많은 정책 및 제도와의 연계 속에서 이해되고 추진돼야 한다.

문재인 정부 농정의 최대 화두가 되고 있는 직불제 중심 농정이 우리 농업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제도적 기반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한 번 계약하면 9년을 기본으로 하는 임차인 중심의 농지이용제도(원할 경우 상속까지 가능한)를 우리가 도입할 수 있을까? 소득세는 물론 부가세 적용으로 농업활동에 대한 경영 상태 파악이 가능한 농업경영 관리시스템이 우리에게도 가능할 것인가? 농업인 사회보장 시스템을 통해 일정 연령이 되면 농업현장에서 은퇴하는 구조가 우리에게도 가능할 것인가?

부재지주에 의한 농지소유가 확산돼있고, 여전히 임차인의 권리가 취약한 상태에서 직불제 강화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노후 대비 사회보장이 불충분한 여건 속에서 농업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고령 인구가 날로 증가하는 상황 속에서 직불제 강화는 농업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목표가격 인상과 직불제 확충논리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쌀중심의 직불제 강화로 인해 악화될 것으로 보이는 직불제의 지역간 형평성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공익형 직불제 강화를 위한 정책적 기반이 우리나라에도 가능할 것인가?

UR 이후, WTO와 FTA로 이어지는 개방국면 속에서 어려운 농업부문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취해진 각종 사회적, 제도적 예외조치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직불제가 궁극적으로 가져야 할 정책목표, 즉 농업경영체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원문:농정연구센터

 
 

저작권자 © 전업농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